영화 리뷰

홍대용, 과학기술 사상, 지동설, 공거제 주장한 지식인

life another 2021. 9. 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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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땅덩어리는 하루 한 번씩은 돈다"

 

담헌 홍대용은 18세기 영조,정조 시대에 뛰어난 과학기술 사상을 온 국민에게 감동적으로 보급시킨 실학자이다. 당시 서양의 과학기술이 북경을 통하여 어느 정도 들어와 있었으나, 홍대용의 지동설은 독창적인 연구의 결과로 높이 추앙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호정필담' 등 자료에 따르면, 그가 청나라에 갔을 때 '담헌 홍대용이 지동설을 주장하여 청국 내 백성을 놀라게 하였다.'라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담헌의 묘지에도 '서양사람이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적은 있으나 지구가 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담헌이 지구가 한 번 돌아 하루가 된다고 상조하였으나 그 묘 미현 오함을 저서로 남겨 놓지는 못하였다. 다만 만년에 자전설에 확신을 가져 결코 의심치 않았다.' 고 적어놓았다. 본격적인 저서로는 이 학설을 체계화하지 않았으나, '의산문답'에 '무릇 땅덩어리는 하루에 한 번 씩 돈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으므로, 그의 자전설 체계화는 이미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틀림없었다. 그가 북경에 갔을 때 독일 사람과 만나서는 역시 천문학에 고나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천문과학기술문화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던 것이다. 당시 관상대에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접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하도 끈질기게 졸라대므로 그 열의에 감동한 수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담헌으로 하여금 진지하게 시설을 관찰, 연구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앞섰기 때문에 풍부해질수 있어 당대의 독보적 존재로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기술학은 말기라 하여 중인이 전담했던 분야였는데 여당인 노론의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인 그가 과학기술을 '정신의 극치'라고 표현하면서 '과학기술을 빨리 전파하여 이를 생활 하하지 않으면 국력을 키울 수 없어 결국 남의 나라에 질질 끌려 다니게 된다'라고 역설하였으니 그 말의 적중함이 어찌 당시에 한 할 수 있을까. 따라서 그는 전해지는 음양오행설을 '근거 없다'라고 일축하면서 그와 연관된 미신타파에 앞장섰는데 이는 정통 문화의 질적 수준을 높인 쾌거가 아니할 수 없다.

 

"양반이라도 놀고 먹는 자는 나라의 좀"

 

화폐는 흐르는 물과 같다고 외친 홍대용은, 권력이나 금력은 뜬구름이며 들어왔다가는 반드시 나가게 마련이라는 심오한 인생철학을 후세인에게 남기고 있다. 사람의 정욕은 혼인의 예를 갖추어 음락 성을 금해야 하고, 주택은 검소로써 사치를 억제해야 하며 어육은 먹되 함부로 남획하지 말며 산의 나무를 남벌해서는 자연을 훼손할 뿐 아니라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역설하였다.
 그는 시종일관 과학적인 태도와 생활철학, 그리고 비판적, 개혁적 안목으로 살아왔다. 30년을 스스으로 섬긴 당대의 거유 석학 김원행의 가르침을 받아왔으면서도 스스로의 학문을 비판할 줄 안 그는 심오한 학문적 연구 태도와 함께 과학 하는 '소신 학자'로도 평판이 나 있었다. 35세 때 숙부 홍억을 따라 북경에 가서 엄성, 반정균, 육비 등 당대의 청나라 석학들과 필담으로 교유하여 '건정 필담'을 남겼다.
 특히 엄성과의 교류는 빛났다. 엄성은 담헌이 준 향묵의 냄새를 맡으며 최후를 마쳤다고 하는데 그가 죽은 뒤 제문을 보내 깊은 우정을 표하였다. 답헌은 가문 덕분으로 벼슬하는 '음관'제도에 따라 44세 때 선공감의 감역이 되었고 47세 때 사헌부의 감 찬이 되어 기강 확립에 심혈을 기울인 바가 있다. 그 뒤 태인 헌감, 경상도 영주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니 그의 벼슬길은 10여 년 간으로 그리 화려하지는 못하였다. 역시 실학자로서 과학 사상을 보급 전파시키는 데 더 큰 공로가 있었다고 본다.

전의 혁명적인 발언을 하여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다. 신분을 따지지 말고 재학이 있는 자는 중요한 직책에 등용해야 한다고 외친 그는, 지방마다 면단위까지 학교를 두어 8세 이상 자제는 누구나 의무교육을 받게하고 과거제도를 공거 제로 전환할 것도 아울러 역설하였다. 홍대용의 인물됨을 그 주위에서는 '처사에 매양 법이 있고 순박하여 유학자의 풍이 있었고, 생긴 모양이 공손하고 얼굴에 항상 화기가 있어 도인다웠으며 온순의 덕을 갖춘 유학자다운 인격자로서 항상 독실 근면하고 검박한 생활을 하였다.' 고 평했다.

'일하는 자만이 먹고 샇ㄹ게 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국민이 바로 개로 정신을 갖는다'며 일하며 건설할 것을 주장한 그는 '담헌서', '을 병연 행록' 등 그의 체취를 맡아볼 수 있는 저서를 남기고 53세에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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