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박제가, 근대화에 앞장선 서자 실학자

life another 2021. 9. 7. 21:09
반응형

10대에 익힌 북학의 이해

 

고독한 천재로 당시 사회에서 냉대 소외되었던 실학자 초정 박제가는 북학파의 뛰어난 이론과 실제를 병행시킨 인물이었다. 자는 차수 호는 초정, 정유, 위향도인 이라 하였다.

그는 유년기를 서울 남산골 아래서 보냈으면 11세애 부친을 잃은 후에는 어머니의 바느질 품삯이 생계의 중심이 되는 어려운 살림이었으며 자주 이사를 다니는 떠돌이 신세이기도하였다.
당시에 있어서 서자는 푸대접을 받는 봉건 덕 질곡 아래 불우산 일생을 보내야만 하는 숙명에 놓여 있었다.
활달한 성격에 넘치는 재간을 지닌 그에게 서얼이란 할 많은 신세는 집안의 가난과 아울러 그를 고뇌 속에서 단련시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정신적 개안에 박차를 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제가는 가정적으로 비록 불우하였다고는 하지만 친구와 스승에 있어서는 스스로 드문 일이라고 자부하리만큼 복이 많았다.
그가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이덕무, 박지원, 유득공, 이희경 등과 사귄 것은 18세 때의 일이며 그 후 이들은 침식을 같이 하다시피 하면서 보람에 찬 젊은 시절을 한 모임을 만들어 지냈다. 이때 열심히 연구하는 분위기가 이들이 북학파라는 새로운 학풍을 지닌 새 학파로서 부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시는 이른바 4인의 시문으로서 먼저 연경에 소개되어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그는 하나의 탄환같이 빨리 시심이 이루어지는 시인으로서도 천재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는 그동안 연구하였던 것을 실제로 검토해 보고자 중국에 가보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런 바람은 그가 29세인 1778년에 실현되었다. 당시 정치가인 남인 체재공이 그와 이덕무에게 기회를 주어 연경행이 그들에게 주어 진 것이다.

 

북학의 새로운 이해

 

그들의 연경 일대 여행은 3개월간 계속되었다. 약 한 달간 그 곡에 체류하였는데 돌아와 3개월 만에 그 유명한 '북학의'를 집필 완료하였 던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국가와 민중의 가난 즉 궁핍을 해소하고자 함이다.' 고 하는 명 논설이었다. 그것은 그 20년 뒤 그가 경기도 영평 현령으로 재직할 때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요청으로 바치가 되면서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북학에 대한 새로운 이 헤가 펼쳐진 것이고 글을 좋아하는 정조도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신설된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명되어 이후 생애를 여기서 보내게 되었다.
 포함 세 차례의 중국 북경을 왕래하는 사이에 청의 학자 문인과 교류하였고 특히 학계의 원로인 예 부상서 기균과 담론 한 것은 유명하다. 기균은 그를 보고 '조선에 저런 박식하고 고귀한 학자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고 칭송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인격과 식견 시, 서, 화의 절묘한 경지는 중국에서 더욱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정조가 서거한 뒤 격변한 정세와 남인의 몰락의 여세는 그의 태에자용을 시기하던 무리에게 탄압할 수 있는 빌미를 던져주었다. 결국 북학의 열변으로 그는 미움을 사서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가고 말았다. 그가 죽음이라는 코너로 몰려 사색이 된 것은 '북학의'와 같은 논설을 펴낸 때문이었고 사지에서 벗어난 이유는 그의 말대로 죽기를 무릅쓰고 가혹한 심문을 견딘 탓이었다.
3년 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 후의 소식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개명된 식견은 서양 세력의 동양 진출의 물결을 따라 전해진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천문대에서 일하고 있는 서양인들은 모두 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도에 정통하고 있으니 이들을 초빙하여 청년들로 하여금 그 천문, 의약, 채광, 조선 등 과학기술을 배우게 하면 수년 내에 부국이 눈앞에 전개된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 이단으로 몰린 천주교에 대해서 '천주교는 불교와 별 차 없는 것이고 그 과학 기술은 불교에 없는 장점이라.' 고 논하면서 보수파의 질시를 무릅쓰고 나라를 위하여 소신을 표명하였다.

 

독자적인 국방론

 

그의 사상의 선진성은 그의 독자적인 국방론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군비라는 것은 민중의 일상생활과 직결되어야만 비용은 안 들고도 착실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라고 밝힌 '북학의'의 '병론'에서 그는 '군비와 기술과 생산력은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룬다.' 고 역설하고 있다. '용차 하면 수레나 병기는 아니로되 자연 수송, 보급의 편이 마련되는 것이고, 벽돌을 쓰면 견고한 성벽이 마련된다.' 고 했다. 이와 같이 백공의 기예가 직접적 군비는 아니지만 그것이 성황을 이루면 비용은 안들 고도 실속 있는 군비가 된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였던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