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실천가
안국동 우정국에서 치솟은 불길
서재필은 고종 3년 서광언의 둘째 아들로 외가인 전라도 보성군에서 출생하였다. 약관 14세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친척 서광범의 소개로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의 감화를 받은 그는 188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야마 학교에서 1년간 공부와 무예를 닦고 돌아왔다.
이때, 서재필을 비롯한 15명의 유학생들은 조국의 사관들에게 신식 전술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다.
김옥균, 서재필 등 급진 개화파의 정치 서클인 개화당 멤버는 정권의 장악과 국민국가 형성을 표방하고 우정국 개설 축하파티를 구실 삼아 민영익 등 개화 정착에 저해 세력이라고 믿던 사대 수구당 무리를 제거함과 동시에 고종을 새로이 모시면서 민중이 중심이 되는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 개화파들은 신정강령 14개 조를 내걸고 과감한 정치적 개혁을 단행코자 큰 포부를 폈으나 3일 만에 실패의 쓴 잔을 들어야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고 의자 했던 일본의 배신과 사대 수구당을 지원하는 청국 군의 수가 일본 주둔군에 비하여 월등히 막강하였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더욱이 민주의 지지기반도 약하였고 참여 폭이 전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3일 천하 하루살이 정권이 바로 서재필 등의 가련하고 기구한 운명의 신긴 개화 정부였다.
시련과 좌절의 10년 망명생활
혁명이 실패하자 개화파 가족들에 대한 참화는 실로 눈물겨웠다. 서재필의 둘째 아우인 재창은 부제학이란 요직이 있었으나 파양 되어 안동 병문을 지나가다 순포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순포는 재창이 셔츠를 입은 것을 보고 개화당이라 단정하여 즉시 타살하였다. 서재필의 아버지 광언은 아들의 변보를 듣고 문을 닫아 식음을 폐한 지 며칠 후 음독 자결하였으며 어머니 이 씨, 부인 김 씨도 모두 목매어 자결하였다.
서재필 등은 역적으로 몰려 근친이 참화를 당하게 되자 재빨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은 잘못이었다. 따뜻하게 발을 뻗고 잠잘 집 한 칸도 마련해 주지 않는 냉랭한 대접이었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광범, 박영효 동지와 같이 배를 타고 미국 LA로 건너갔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샌드위치맨'으로 돈벌이를 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신문을 배달하였고, 구두도 닦고, 접시를 닦는 등 정착하여 기반을 잡기까지는 피눈물 나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여기서 그는 은인을 만났다. 홀덴 백이랑 분이 바로 그의 앞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그는 라파예트 대학까지 입학하였으나 졸업을 못하고 동부의 필라델피아로 가 육군의 총감부의 번역관으로 종사하면서 8개월 뒤 조지 워싱턴대학 의학부에 입학, 의사의 길을 밟았다. 그 후 모교에서 교수직을 가지고 가필드 병원에 나가 세균학을 연구, 한국인 최초의 세균 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5년에는 미국인 처녀 암스트롱과 결혼, 국제결혼으로서도 선구자였다. 이것이 주체성과 연관하여 말할 때 장해 요건이 되기도 하지만 그의 가습 속에 체질적으로 불타고 있는 애국애족의 용광로에는 아무런 열기의 이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독립협회, 독립신문, 독립문
서재필은 우연히 만난 박영효로부터 조국의 소식을 듣고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돌아가서 개혁의 의지를 펴서, 우리 조국도 선진대열에 끼어들어야 한다.' 고 되뇌면서 그리운 고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 소지자였기에 중추원 고문으로만 활동하였다.
'국민이 깨우쳐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
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 발간, 독립공원 조성, 독립관 개관, 독립협회 조직 등을 차례로 다부지게 성사시켰다. 이러한 성과는 그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절대 자주독립 정신'의 뿌리가 깊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는 러시아공사관으로 가 있는 고종에게
'대궐로 돌아가시옵소서. 이 나라는 폐하의 나라이고 국민은 폐하의 국민입니다. 남의 나라 공사관에 와 계시면 세계열강이 우리나라를 업수이 여기게 됩니다.' 하고 처절히 경운궁(덕수궁)으로의 환궁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특히 독립협회는 의회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 화이이면서 민주주의 정치적 제도적 보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갑신정변이 윗사람 중심의 개혁-변혁운동이었다면 독립협회의 민권, 현실 개혁운동은 실학정신을 이은 민중 속에 그 지지 기반을 다진 다는 데에 큰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귀국하여 2년 남짓했을 때 소위 세계열강 등의 축출 압력이 성화같이 울려 퍼져 그는 두 번째 망명을 단행하였다.(1898.5). 최근에 발견된 서재필의 상소문 속에는 비록 그가 개화론자였으나 가문의 대를 잇는 양자문제에는 보수성을 보이고 있음이 특징이었다. 1947년 세 번째로 고국에 왔다가 돌아가 6.25중에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 백성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함.'이라는 독립신문 간행사를 통하여 민족주체의식과 주인정신의 필요성, 건재 성 등을 목청 높여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