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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뒤흔든 홍구공원 투탄 의거
한인 애국단의 김구 정신을 실천으로 옮겼던 무명의 시골 청년 매헌 윤봉길은 충난 예산군 덕산면에서 출생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호 11시 40분, 홍구 공원에 모인 축하객이 경건하게 묵념을 드리는 순간이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몇 차례 요란한 바람과 함께 파열음을 내면서 식장을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아이코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하는 소리가 신음과 함께 주변을 처절케 하였다. 불과 몇 초 사이에 가히 세계를 뒤흔들고 역사에 길이남을 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 명의 축하객은 혼비백산, 우왕 좌와 갈피를 잡지 못하였으나 회심의 미소와 성공의 상기된 얼굴 모습을 보인 사나이가 있었으니 침략자의 처단과 애국심으로 불타고 있는 청년 윤봉길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의 요인들과 온 국민이 한 애국청년의 쾌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윤황의 아들로 출생한 윤매헌은 남달리 부지런하고 총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근면성을 강조한 실례적 사상은 최근에 공개된 그의 일기 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즉 1929년 2월 11일에
'만물을 창조하신 조화옹이 동서양에 대하여 선과 악의 차별이 없었겠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빈궁에 빠지어 고통이라는 굴레를 버리지 못하였느냐. 그 이유를 내가 알겠다. 그것은 나태라는 것이다. 근로 무 가지고로 부지런하면 되겠지.'
하는 내용을 보면 그는 평소의 생활 신조를 근면, 성실에 두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문을 공부하던 시골청년 윤의사가 16세가 되던 때에 일어를 자습하기 시작한 것은 3.1 혁명 이후 민족의 3대 진로 중의 하나인 실력양성이라는 신념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증거이기도 하였다. 결국
'범을 잡으려면 그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는 것이 어린 가슴 속에 용솟음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는 자기 혼자서만 알아서 느 아니 되겠다고 동네에 강습소를 열고 향리의 무산 자제를 교육하였다.
그는 마침내 19세 때 중국 청도로 망명하여 새로운 국면을 갈구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혁명지사가 집결되어 있는 상해로 찾아갈 것을 주선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아 몇 년을 피혁회사의 직공, 야채상, 행상 등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였다.
백범과의 만남
근면, 성실성 있는 그의 애국심의 발로는 마침내 상해 임정의 백점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20대 청년을 유심히 바라본 50대의 우국지사는 곧 그를 한인 애국단에 가입시키고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애국은 정당이나 세우고 연설이나 잘하는 것이 아니고 묵묵히 실천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구국의 일이다.'
라고 설득하였다. 김구 앞에서 죽음의 선서를 호쾌하게 할 수 있었던 윤봉길 의사는 김홍일이 제작 실험했던 사제폭탄을 받고 일황 생일 축하 시장으로 달려갔다.
1932년 4월 29일, 거사의 날이왔다. 이날 아침 김구와 그는 최후의 조찬이 될지도 모를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이때의 윤봉길의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고 김구는 말한 바 있다. 그는 백범의 손을 잡고
'선생님 염려 마십시오. 저는 꼭 해내고야 맙니다. 영광된 조국의 앞날을 위해 이 몸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비장격월한 말에 이 애국청년을 아끼는 백범도 말끝을 맺지 못하고 손만 흔들었다. 그는 도시락에 폭탄을 숨겨 가지고 유창한 일어로 일본인을 가장하고 검문검색을 무사히 통과, 연단 앞에 침학 하게 정좌하였다.
식이 시작될 무렵 숨을 죽이고 있던 윤의사의 손이 도시락을 열고 '한민족의 함성'인 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아수라장이 된 것은 던지는 동작과 거의 같은 시각에 일어났다. 쾌재를 부른 것은 윤의사와 김구 선생이었다.
장렬한 최우와 임정의 활기
성공의 기쁨을 김구는 감격의 눈물로 대신하였다. 상해 일본인 거류민 단장 가와 바라 및 일군사령관 히라카와 등 10여 명을 살상케 한 윤의사는 현장에서 피검, 11월 8일 이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11월 20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구국의 화신이 되었다. 그는 사형집행에 임하여 유언으로
'나의 조국이 속히 완전 독립되기를 바랄 뿐이다.'
라는 한국인 다운 기개를 편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또 친필로 아들 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너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이 윤의사의 의거로 인해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윤봉길의 의거가 있은 직후에 감동한 장개석 주석이 '중국의 백만 군대도 하지 못한 것을 한국의 한 의사가 능히 해냈으니 장하도다'라고 소감을 말했을 정도로 그의 의거는 역사 전환의 한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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