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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박영효, 좌절된 개화의 신념

life another 2021. 9. 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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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가 보장된 임금님 사위

 

김옥균과 박영효는 19세기 후반에 비밀 정치결사인 개화당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일을 한 급진적인 개화파 인물들이다. 이들이 개화운동에 목숨을 걸고 뛰어든 것은 분명히 선각자적인 의식과 투철한 진보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개화파들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영효는 판사 박원 량의 아들로 출세가 보장된 인물이었다. 더욱이 고종 10년 그의 나이 12세 때 전왕 철종의 딸인 영혜 공주와 결혼하여 금릉위에 봉해지니 그의 앞날은 누구보다도 촉망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왕의 친척이 됨으로써 현실적 용 막을 실현하는데 장해를 느끼지 않았던 박영효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던 김옥균과 비교된다. 이 점이 개화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김옥균이나, 권력의 중심부에 밀착되어 있는 인물은 박영효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영효는 그의 일가인 박규수의 집에 출입하면서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민역익, 오경석 등과 교류하였고 특히 유대치에 대하여 그의 인품과 식견 그리고 서민적 사상과 개화 의식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후일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그들은 유대치를 대통령에 추대할 계획조차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영효가 처음으로 중대한 임무를 밭은 것은 22세 때였다. 즉 그는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가게 되었거니와 그것은 1882년 8월 13일, 일본과 체결된 제물포 조약의 약정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박영효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이 상하가 합심하여 소위 '명치유신'을 일으켜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서양의 과학 문역이 도입되어 제반 산업이 크게 일어나고 있음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감명과 경탄은 그를 수행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도 공감한 바였다.

 

개화의 뜻을 다 떨치지 못하고

 

박영효는 김옥균 등과 협력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 낡은 국정을 개혁하고자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청사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 정변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군사와 경찰의 실권은 박영효와 홍영식이 잡고, 내무와 재무의 실권은 김옥균이 쥐었으며, 14개 조의 시정요강을 발표하였다,. 사태가 이와 같이 진전되자 사대당은 천나라 장수 원세개와 밀의하여, 청군을 동원 창덕궁을 공격해 왔다. 그래서 마침내는 청, 일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중과부적을 자인하고 독립당의 적극 개입 요청을 거절한 채 물러서고 말았다. 이에 혁신 정부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박영효 등은 실패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는 야마자키라 변명하고 독서하는 생활을 보냈다. 이 당시 그는 망명지에서 조국의 조정에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갑신정변이 충군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로되 국가에도 무익하고 그 자신으로서도 부모 형제, 친구들이 죽기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을 참회했다. 하지만 그는 갑신정변 때 내세웠던 14개 조의 정령보다 더 발전된 민주 사상을 피력하고 있으니, 그의 개화 정신이 더욱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는 '당연히 행할 것을 행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앙화를 받습니다. 또 비상한 일을 한 뒤에야 비상한 공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지탄받는 말년의 행동 

 

그는 망명한 지 10년 만인 1894년에 역적의 누명을 씻고 돌아와서 다시 작위를 받고 정치 무대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일본 대사의 영향에 힘입어 그 해 12월에는 내무대신이 되었다.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한 때 총리대신 서리까지 올랐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양 내각이 사직하자 그는 민비 시해 음모죄로 몰려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 6월에 또다시 돌아와 궁내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또 대신 암살 음모 사건에 말려들어 한해동안 제주도에 유배된 일도 있었다. 1910년 이른바 경술국치 뒤에 박영효는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39년 9월에 일흔 아홉살로 죽을 때까지 조선 식산은행 이사를 포함한 이런저런 벼슬을 지내고 정삼 위에 서훈되기도 한 박영효는 일제 밑에서 친질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더욱이 조선총독부 관보에 보면 그는 전국의 많은 토지를 서슴없이 불하받는 따위의 일로 애국지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로써 1880년 즈음에 갖고 있던 개혁과 독립의 신념과 의지와 열망을 거의 사라진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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